느리게 걸으며
조 은 미
날씨가 유난히 맑다. 걷기에 딱 좋은 날씨다. 50 년 지기들과 만나는 날이다. 언제 만나도 편안한 벗들이다.
안국동 역에서 만나 발길 닿는대로 걷는다. 1번 출구 나와 직진하다 보면 고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미술품 전시관이 들어설 자리에 열린 송현 광장이 보인다.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꽃밭이 조성되어 있다. 꽃은 거의 졌지만 담장을 헐어버린 광장은 도심의 숨구멍 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젊은 직장인들의 밥 때를 피해 일부러 느적거린다. 목적없이 어슬렁 거리는 여유가 더 없이 좋다. 에스카레이터도 뛰어올라가며 숨가쁘게 살아야되는 세대는 누릴 수 없는 축복이다. 오랜만에 북촌 길로 접어들어 옛 경기고 자리에 위치한 정독 도서관 쪽으로 발길을 향한다. 온통 붉게 물든 가을이 아직 서성이고 있다. 떨어진 낙엽도 꽃이다. 겨울엔 나무의 이불이 되고 썩어도 나무에게 거름이 되겠지. 남은 인생도 단풍처럼 불타다 낙엽처럼 아름답게 지고 싶다. 햇살을 길게 늘이며 해도 느릿느릿 기어간다. 등나무 의자에 앉아 도란 거리는 이야기 속에 세월의 무게만큼 정이 얹힌다. 까르륵 거리는 웃음 속에 평화가 내려앉는다. 1시가 겨워서야 슬슬 일어나 근처 유명하다는 청국장 집을 찾아 나선다. 밑반찬도 맛나고 구수한 청국장도 입에 붓는다. 파전과 도토리 묵을 곁들여 맛나게 점심을 먹었다 . 윤보선로 골목을 어슬렁 거려본다. 눈에 닿는 것마다 정겹다. 인사동 쪽으로 걸어 내려와 익선동을 기웃거린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돌려세운 재미있고 특색있는 가게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국적인 전통 문화를 느낄 수 있어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타르트가 맛있다는 감꽃당 찻집에 들어가 느긋하게 앉는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실내에서 감나무가 자라는 집이라는 유명세를 타서인지 사람들이 많다. 폐쇄된 공간에서 아직도 파릇한 잎을 달고 있는 감나무가 신기하다. 구수한 커피향에 느릿느릿이 주는 편안함을 즐기며 끊임없이 이야기 꽃이 핀다.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돈다. 따사로움이 달달한 타르트에 묻어 혀끝에 녹는다. 서로 있음이 소중하고 고마운 벗들. 아직 내 발로 걸어 이리 건강하게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 오래 동행하기를 빌어본다.
빠르게 걸으면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눈과 가슴에 담으며 여유로웠던 하루. 마음은 여전히 푸른 빛이 돈다. 돌아오는 귀갓길. 전철의 경로석 빈자리까지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
'자작 수필,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장난 시계 (2) | 2022.11.11 |
---|---|
마음을 나누는 기쁨 (0) | 2022.11.10 |
밤을 까며 (0) | 2022.11.07 |
몸의 소리에 반응하며 사는 지혜 (0) | 2022.11.05 |
마음과 마음이 만날 때 (0) | 2022.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