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기한
조 은 미
이런 저런 일로 바빠 몇 주만에 잠깐 짬을 내어 시골집에 다녀오러 나섰다. 계절이 지나간 자리가 역력하다. 가을이 휘젓고간 빈집은 성클하고 황량했다. 제멋대로 활개치고 풀이 자란 마당하며 무성하게 자랄대로 자라 꽃이 지고 잎마저 병이 든 봉숭아가 추레함을 더하고 있다. 작약도 잦은 비에 검게 썩은 줄기만 버티고 있다. 어디를 봐도 떠나가는 것들로 우중충하다. 화사하게 마당을 채우던 활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 꽃이 예쁘다 하나 그것도 한 때이다. 피었다 가는 것이 순리련만 지는 꽃의 허망함이 왠지 안스럽고 괜스리 마음이 울적해진다.
현관문을 여니 훅 끼치는 냉기가 섬뜩하다. 천장에는 굼실거리는 하루살이 애벌레가 하얗게 붙어있다. 푸근히 쉬었다 가야겠다는 야무진 소망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어머, 벌레"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엉그럭을 받아줄 사람도 없기에 파리채를 들고 전사가 되어 고물고물 기어다니는 미물들과 한판 승부를 벌린다. 다 잡았나 하면 어디서 또 끈덕지게 기어 나와 약을 올리며 사람 진을 뺀다. 어딘가 근원지가 있겠지 싶어 씽크대 문을 여니 언제 사다 넣어두었던 표고버섯에 뉘가 슬어 애벌레의 온상지가 되고 있었다. 천장 꼭대기 까지 어떻게들 기어 올라갔을까? 그 대단한 끈기에 감탄 마져 나온다. 시장이 멀어 이것저것 욕심껏 사다놓고 깜박 잊고 있었던 식품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나 버린 것들이 많기도 했다. 아깝지만 정리하는 김에 모두 빼내 폐기 처분을 한다. 깨끗이 원인 제거를 하고 비로소 한숨을 돌리고 앉는다.
마당의 봉숭아와 대문 앞의 풀을 대충 뽑고서야 집꼴을 찾아간다. 이제사 토라졌던 뜨락의 부은 볼이 풀리며 돌아섰던 마음을 풀고 곁을 준다. 사람이나 집이나 조금만 손이 덜가고 사랑이 부족하면 그리 냉랭하고 찬바람이 도는지.
저녁으로는 제법 바람이 차다. 구름이 짙은 하늘엔 달도 숨었다. 그네에 흔들리며 깜깜한 어둠 속에 잠긴다.
며칠 전 하지정맥류 수술하고 난 끝이 아직 흐림이다. 간단하게 수술이 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영 팔딱 거려 지지가 않는다. 무슨 일을 좀 해보려해도 굼뜨고 기가 빠져 힘에 부친다. 일부러 작정하고 일어나지 않으면 한도 없이 등이 소파에 자석처럼 늘어 붙는다. 그것도 수술이라고 나이 값을 하는지 한동안 유세를 할 모양이다.
사람이 만든 모든 생산품에는 유통기한이 표시되어 나온다. 뜯지도 않고 찬장에 쟁여놓았다 결국 한번 먹어보지도 못하고 폐기처분하여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물건들을 생각해본다. 나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남았을까? 한 세대 전에는 평균 수명이 40이라 60 을 넘기면 다음해 회갑연을 열어 축하를 하고 70이 되면 드물게 오래 산다고 고희라 하였지만 어느새 70은 장년이라 할 만큼 100세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아파서 떠날만 하면 병원에서 유통기한을 연장해주니 늘어난 유통 기한을 조기 폐기 처분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려면 더욱 자신을 지켜가는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우선 건강이 받쳐주어야할 것이다. 그 다음은 경제적인 독립이 보장되어야 하리라. 노후를 생각하며 자식들에게 엎어지지 않도록 현명하게 자산을 관리하는 것도 노후에 반드시 필요한 지혜일 것이다. 내려놓고 버리는 일에 좀더 너그러워져야 하겠다. 작은 일에 핏대 세우고 열받지 말고 어지간한 일은 그러련하고 넘어가주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관계의 울타리를 더 든든히 엮도록 마음의 자물쇠를 열고 손 내미는데 인색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릴 일이다. 항상 사랑으로 충만한 따스하고 활기찬 시간으로 채워가도록 노력하자.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살려 외롭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일이다. 맛난 것 찾아다니며 먹고, 좋은 사람,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가고 싶은 곳 가고, 품위를 갖추어 옷도 차려입고 이제는 나를 위해 투지하며 살자.
밤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아침이 오리라.더 이상 처지지말고 내일은 집나간 입맛을 불러 올 궁리를 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