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단상

살 처분

조은미시인 2021. 10. 16. 07:02


살 처분
조 은 미

구제역 살 처분  돼지 이야기가 아니다
화장대에 놓인 오래된 전화기가 무엇이 고장 났는지  메세지 알림 표시등이 점멸 상태로 아무리 눌러도 꺼지지도 않고 밤이나 낮이나 깜박 거려 신경을 거스르게 한다.
드디어 살 처분할 때가 온 모양이다.

시대가 변하니 집안 물건의 대접도 달라진다. 우리 어렸을 때는 집집 마다 재산 목록 1호로 치던 재봉틀이 안방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지금 아이들이 들으면 실소할 일이지만 집안에 시계가 없어 나는 태어난 시를 정확히 모른다. 남편은 아침에  돼지 죽줄 때  쯤 나는 저녁 치우고 불 끄고 잘 때쯤 태어났다니 남편은 오전 7시나 8 시경 나는 8 시나 9시경 됐을라나?

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 미국에 연수차  가셨다 돌아오시며 사들고 오신  라디오가 동네 라디오가 되어 저녁이면  이웃 어른들이 말 오셔서  대청에 모여 앉아 연속극을 함께 들으시던 기억이 난다.

전화기만 해도 전화 놓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매매가 자유로운 백색 전화 값은 부르는 게 값으로 전화가 있다는 것이 부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그 뒤 청색 전화가 풀려 사정은 좀 나아졌지만 셋방 사는 이들은 의례 주인집 전화로 대신 연락을 받으며 감지덕지 고마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허무 맹랑한 이야기 쯤으로 들리겠지만 불과 오륙십 년 전의  실화이니  모든게 흔해서 귀한 줄  모르는 오늘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 지감이 있다.  이 가난의 뿌리를 뽑아내고 이만큼 부를  일궈 낸 초석을 놓으신 분이 독재자로 손가락질 받는 박정희 대통령 이라는 것을 젊은 세대들이 알까 모르겠다.

이제는 전국민 핸드폰 시대라 집 전화가 없는 집도 많다.
나의 유일한 집 전화 사용처는 수시로 핸드폰  둔 곳이  생각 나지 않아 찾을 때이다.
그 외에는 거의 무용 지물로 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날 때가 많다.
이 물건이 하도 무심하게 푸대접하니 반란을 일으키는지 밤이나 낮이나 껌벅 거리며 신경을 거스리게 한다.

사람도 사랑이 고픈 사람은 늘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고 자기 방어막을 치고 사사건건  예민하게 반응하여 상대방을  피곤하게 한다.
사람은 달래나  보지만  고쳐볼 수도 없는 너를 어쩌겠냐!
도저히 참아줄 한계를 넘어서니 넌 이제 내 인생에서 아웃이다. 오늘부로 살처분 단행하고 핸드폰 찾는 용으로 제일 쌈지막한 걸로 하나 사다 놓으리라 마음 먹는다.

어느새 우리 나이도 내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용도 폐기될 나이가 되었다.
뒷방 늙은이로 팽 당해 살지 않으려면 시대의 물결에 자연스레 반응하면서  경직된 사고의 폭을 넓혀 고집을 내세우지 말 일이다.
고장난 전화기처럼 아무 때나 어른입네
껌벅 거리며 주책없이 끼어들다가는 어느새 내 주변에  젊은 이라고는 씨가 마를지 모를 일이다.

젊은 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같은 자리에 앉아서  한국말을 하는데도 가끔 못 알아듣는 말이 생긴다.
요즘 주류를 이루는 축약된 신조어들의  뜻을 일부러 인터넷이라도 찾아  따로 익혀 젊은 세대와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호흡하며 컴퓨터나 인터넷과도 친해져 문맹으로 살지 않도록  배움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그럽게 포용하고 입은 될 수록 닫고 주머니는 열고 살아야 그나마  내 설 자리를지켜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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