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육이를 보내며
조 은 미
장마 끝이 쇠심줄같이 질기기도 하다.
오늘도 뿌옇게 볼이 부은 하늘이 내려와 넙죽 엎드렸다.
나뭇잎조차 미동을 안 하는 걸 보니 바람도 아직 기침 전인가 보다. 아침부터 후덥지근하다.
한차례 소나기라도 또 쏟아질 모양이다. 이런 날은 괜스레 마음도 몸도 가라앉는다.
소파에 심드렁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다가 창가 화분에 눈이 머문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건만 오늘 처음 보는 양 생경하다.
건성 지나칠 땐 보이지 않던 것이 자세히 보니 언제 명을 다했는지 다육이 하나가 말라 비틀어져 색이 바랜 지 오래다. 또 다른 다육이는 제 몸에 무겁게 조롱조롱 새끼를 달고 있다. 매일 보는 화분인데 이게 인제야 눈에 들어오다니!
사랑한다고 반려 식물로 곁에 두고 기르면서 그토록 무심할 수가 있었을까?
팽개쳐놓았던 무관심이 미안해진다.
아무리 소중한 것도 필요가 충족되면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공기나 물이 없으면 당장 생존이 위협받는데도 막상 그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감사함을 모르고 살아간다.
폐쇄된 공간에서 숨이 막혀 보거나 갑자기 단수되어 물이 나오지 않을 때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삭막한 공간에 푸르름을 선사한 덕분에 그래도 촉촉하게 윤기 있는 삶을 살았음에 새삼 감사한다.
몇 년을 제법 싱싱하게 잘 자라다 분신 하나 남겨놓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다육이를 화분에서 빼내면서 마치 우리네 인생을 보는 그것 같아 좀은 비감한 생각이 든다.
새집 짓고 이사 오면서 들여왔으니 줄잡아 6년은 함께한 것 같다.
작은 화분에서 오롯이 혼자만 크다가 가니 그걸로 끝이다. 식물도 영혼이 있다면 후사도 없이 스러지는 자신에 대해 한없이 아쉽고 서운함을 느꼈으리라.
자신을 닮은 개체를 퍼뜨린다는 그것은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의 본능이고 의무이며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것이 창조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이고 사명이 아닐까?
요즘은 You only live once 를 내세우는 YOLO 족이 대세이다.
결혼해도 아기 낳기를 꺼리고 부부끼리만 즐기며 살자는 신사회 풍조가 유행이다.
결혼하면 자식 낳아 기르는 당연한 의무까지 필요 없는 인생의 낭비라 생각하여 일찍 단산하거나 아예 가질 시도조차 하지 않는 부부가 많다 보니 점점 신생아는 줄어들고 노령화는 가속화되어 인구 절벽의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집마다 대여섯씩 형제자매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옛날에는 아기를 지울 특별한 방책이 없기도 했겠지만 제 먹을 복은 제가 타고난다며 어렵고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자식을 많이 낳는 걸 보람으로 생각하여서 한 생명의 태어남을 기뻐하며 축복으로 여겼다.
어딜 가나 아이들 울음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지금은 그야말로 동네에서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를 듣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워졌다.
시골은 온통 노인 세대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인구 감소로 인하여 나라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 때는 산아제한 정책의 하나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유행이었다. 요즈음은 다둥이 부모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며 우대하고 있지만,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과 노력보다 현실적으로 지원이 턱없이 못 미치기에 아기 낳기를 피하는 신혼부부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시골의 작은 분교들은 학생들이 없어 아예 폐교되는 학교가 많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새 살아온 날 보다 남은 날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어느 날 아무 흔적도 없이 스러져 그걸로 끝이라면 얼마나 허무할까?
다행히 자식 둘이 제 몫을 다하며 내 손이 안 가도 될 만큼 살아가니 기본적인 내 의무는 다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럽고 잘 커 준 자식들에게 감사하다.
근래 주변에서 가까이 지내시던 분들이 갑자기 쓰러지거나 유명을 달리하시는 분들의 부고를 자주 접한다.
남의 일만이 아니라 미구에 닥칠 내 일이기도 하기에 죽음이 더 가깝게 가슴에 와닿고 생각도 많아진다.
어떻게 마무리를 하고 가는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득이 되고 자식들에게도 지혜로운 처신일까?
이 세상 소풍 와서 잘 놀다 가는 감사 표시로
뭔가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 내 삶을 마무리 하고 싶은 소망이 솟는다
사후 장기를 기증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죽고 나면 무슨 고통을 느낄까마는 그러나 아직은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앞서 결단을 못 하고 있다.
본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게 사시던 분들이 유언으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셨다는 미담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런 이야기들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쓰다가 남기고 가는 그것을 꼭 필요한 곳에 나누고 가는 일은 얼마나 보람된 일일까?
뭐든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자식들이 흔쾌히 동의해주면 좋겠지만 행여나 자식들 서운하게 하며 나 혼자 좋자고 내 뜻대로 고집하는 것이 과연 잘 하는 일일까?
그러나 주신 축복을 감사로 나누고 싶은 내 뜻도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다.
내 자식들이 엄마 마음을 헤아려줄 만큼은 반듯하게 키웠다는 믿음이 있지만, 아직 익지 않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이런저런 상념에서 깨어난다.
하늘이 잔뜩 비를 머금고 서성댄다.
친구와 만날 약속이 생각나 퍼뜩 정신을 차린다.
푸른 분신들을 힘겹게 달고 꿋꿋이 서 있는 다육식물이 얼마나 대견한지!
하나씩 따서 분가를 시켜줘야겠다.
무럭무럭 잘 커가기를 바라며 응원을 보낸다.
분신을 주렁주렁 단 다육이처럼 젊은 임산부들이 자랑스레 배를 내밀고 거리를 활보하며 동네마다 갓 난 아이디들의 울음소리로 생기가 넘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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