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단상

목적이 이끄는 삶

조은미시인 2025. 2. 12. 07:40

목적이 이끄는 삶
조 은 미


  주방 뒷배란다에  과일을 꺼내러 나갔다. 뭔가 검은 비닐 봉지에 싸인 묵직한 것이 발에 걸린다.
뭘까? 하고 열어보니  가을에 밭에서 거둔 무 하나가  남아 추위에 오롯이 떨고 있다.  한 꼬집 뿌린  무씨가 댓개  남짓  싹이 나왔다. 별로 가끌 것도 없어 자라는대로 내버려두었다. 햇살 받으며 제절로 크더니  뿌리가  제법 실하게  굵었다. 소홀했던 무심함이 미안하고  염치는 없었지만 가을 내내  밥상에 올라 요긴한 찬거리가 되었다.


  무심코 발에 채이는 녀석을 보고 이제서야  먹다 놓친 녀석이 생각났다. 깜박 잊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용케 썩지 않고 버텨준 생명력이  대견하다.
오늘은 장례식이나  제대로 치러줘 한을 달래주기로 한다.
우선  뿌리와 잔털을 잘라 수세를 거두고  깨끗하게 세신까지 마쳤다. 경건한 마음으로 손에 힘을 주어 토막을 낸다. 아뿔싸 ! 겉은 멀쩡한데  속에 구멍이 뚫려 있는 배냇병신이었다. 주인의 무관심에 얼마나 속이 탔으면 시커멓게 딱지가 앉고 속까지 비었을까? 속앓이를 하면서 참아내고 달관하여 가슴  속까지 비워낸 그 모습이 안스럽다. 정성껏 환부를 도려내고 납작납작  정성드려 썰었다.  살아 생전  밥상에 오르고 싶었던 원풀이로 황태 무국과  무전으로  서러움을 달래주는것이  도리려니 .


  다시마 멸치 육수 내어  한소큼 끓이다 무와  황태를 넣고 몸이 무르도록  약불에서 진국이 우러날만큼 달여준다.
간장, 멸치 액젓으로 간을 하고  파, 마늘 ,두부 청양고추까지  호사내어  한 소끔 더 끓여준다.  구수한 냄새가  코끝에 진동한다. 곁들여 튀김 가루와 메밀 가루를 1대1로 섞어 반죽을 만들어 무전도 번철에 부친다.  무전 익는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끓는 무국 한 대접에 무 전 한 접시, 곱창김에 김치까지 조상에 참여하니 걸진 장례식으로  이만하면 호상이다. 세상에 어떤 진수성찬이 이 보다 나으랴. 한 수저  맛을 보니  이렇게 맛날수가!
시원한 국물 맛이 환상이다.
무전도 젓가락이 멈춰지질 않는다. 평생  무관심에 서러웠지만 기는 길  이리 존귀하게 대접 받고 가니 푸대접  한 풀이는 되었으리라.   잘 가시게. 내 올해는 그대 귀한 줄알고 좀더 많이 뿌려 정성껏 가꾸리다.


  날씨도 누그러졌다.  한 세상 살다가 마지막 가는 날 나를 아쉬워하고  슬퍼하며 중히 여겨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열 손가락  꼽을 만큼만 되면 잘 살은 삶이리라.  태어난 목적을 이루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값진 삶이 어디 있을까!  나는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이루며 살고 있는가? 나를 돌아보게 된다. 무 한 개로 호상을 치른 아침이다. 달큰한 무 맛의 여운에  그를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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