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단상

여자로 태어난 천복

조은미시인 2020. 10. 14. 14:47












여자로 태어난 천복
조 은 미

골이 깊어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이곳은 어디를 봐도 가을빛이 연연하다.
절친 몇이 오는 날이라 설레이는 마음으로 일찍 잠이 깬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더 드러누울 마음도 없어 서둘러
뭐라도 하나 더 먹여 보내려 재게 손을 움직인다.

멸치 다시마 육수 내어 소고기 무국 시원하게 끓이고 비름나물 삶아 새콤달콤 무치고 묵은지 빨아 된장 들기름 넣고 조물거려 삼삼하게 찜해놓고 갖은 야채 볶아 잡채도 만드는 김에 이웃집도 한접시씩 돌리려 한 양푼 푸짐히 무쳐놓는다.

10시 조금 지나니 왁자하게 반가운 목소리가 현관을 넘는다.
정말 얼마만 인지!
일년치 묵혔던 수다가 늘어지고 며늘아이가 사준 빨간 코트를 돌려가며 입고 모델이 되어 화보도 찍고 술 한 모금 안먹어도 한 낮을 깨가 쏟아지게 깔깔 거리며 그간 코로나로 쌓인 스트레스를 날리면서 10년은 젊어져 모두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즐긴다.

여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에 감사하며 새삼 은퇴한 대부분 주변 남자분들의 윤기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좀 안스러워진다.
젊었을 때는 헉헉대며 가장의 책임을 다하느라 가족들 하고 별 친밀감도 못나누고 죽어라 돈벌고 일하느라 세월 다 보내고 이제 은퇴하여 아버지 대접, 남편 대접 좀 받아볼까하면 가족들은 어느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마누라 손에 3끼 밥 얻어 먹는 것도 삼식이 소리 들을만큼 불편하고 친구 불러내자니 얄팍한 주머니 사정 밥사주기도 편편찮고 여자들처럼 더치 패이는 체면 구기는 것 같아 이래저래 모임자리 피하게 되고 뭐라도 배우러 등록해볼까 싶어 문화센터라도 기웃거려보면 맨 여자들판이라 어디 끼기도 어렵고 애꿎게 등산이나 취미삼아 바깥으로 돌게되니 남자들 노후가 더 쓸쓸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돈 좀 주머니 있는 남자들은 술로나 쓸쓸함을 달래보려 하지만 술에 취해봐야 잠깐이고 시간 지나면 더 허탈하고 건강만 해칠 뿐이고 한껏 호사가 바람 피는 일인데 그도 잘못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명예에 먹칠이나 하게되고 행여 꽃뱀에게라도 잘 못 걸려들면 패가 망신이나 하기 능사니 남자들이 마음 편하게 쉴 곳이 어디일까? 젊은 남자들은 대중교통이라도탈라치면 행여 성추행으로 몰릴까 눈둘 데 손둘 데도 마땅찮고 피곤에 지쳐 들어오면 하늘 같은 아내
비위 맞추기 바쁘고 아침이면 주무시는 아내 깨울까봐 도둑 고양이 처럼 살금살금 일어나 아침도 못 얻어 먹고 출근 하는 남자도 부지기수라니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은 천복으로 감사할 일인 것 같다.

아직 건강주시니 감사하고 주변에
마음 나눌 벗으로 울타리 쳐주시니 감사하고 부모 귀하게 여겨주는 자식 있으니 감사하고 이만 하면 노후에 이런 상팔자가 있으랴 싶다.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던데 오늘 하루도 주신 복을 헤아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두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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