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타는가 보다
조 은 미
어느새 해가 짧아졌다. 일찍 땅거미가 진다. 어스름한 저녁답 시장 보러 가는 골목에 고양이 한마리가 웅크리고 서있다. 길고양이는 늘 경계 태세로 살아서 사람 발자국 소리만 스쳐도 후다닥 피하는데 가까이 다가가도 이상하게 피하지를 않는다. 얼굴이 귀염성스럽게 생긴 배에 흰털이 있는 까만 고양이다. 평소 고양이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고양이가 신기해서 장난기가 발동한다. 앞에 가서 '야옹' 하며 마주 서본다. 내 표정이 호의적인 것으로 판단했는지 고양이도 '야옹' 하며 화답한다. 손짓해서 부르니 꼬리를 세우고 내 곁을 빙빙 돌며 아예 몸을 들이댄다. 가만히 등을 쓸어 주었더니 발랑 누워 네 발을 흔들며 사뭇 애교까지 부린다. 아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는 얼마나 도도한지 머리라도 좀 쓰다듬어 줄라치면 잠깐 건성으로 등을 내밀었다 도망가기 바쁜데 요녀석은 사람한테 강아지처럼 부닐며 사랑스럽게 군다. 내가 움직이면 같이 따라 움직이며 얼굴을 바지 가랑이에 부벼대고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다. 그래도 나름 뭔가 안심이 됐는지 완전 무장해제 태세로 바짝 내 발 앞에 엎드려 사랑을 갈구히는듯 발밑으로 자꾸 얼굴을 파고들며 핥아댄다. 가만히 들어올려 안아본다. 아무 저항도 안 하고 폭 안긴다. 부드럽고 따뜻한 털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온다. 행복한 표정이 역력하다. 얼마나 사랑이 고팠으면 그럴까 싶어 가슴이 짠하다. 몇 번 더 등을 쓸어주다 놓아 주고 일어선다. 나를 빤히 쳐다 보는 그 눈길이 어찌 그리 간절해 보이는지! 떨어지지 않는 벌걸음을 뗀다. 뒤돌아보니 아직도 고양이는 그 자리서 아쉬운듯 나를 바라보고 서 있다. 그 눈빛에 묘한 슬픔이 담겨있는 것 같다. 말 못하는 짐승과의 짧은 우연한 만남이 이상하게 가슴에 킨다.
나간 김에 아버지의 고장난 시계를 고치러 시계포에 들린다. 경대 설합을 열다 아버지께서 차던 손목시계가 문득 눈에 띄었다. 언제 멈췄는지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다. 시계포에서 건전지를 갈아끼우니 째깍거리며 시계가 다시 살아난다. 손목에 시계를 차본다. 아버지의 추억도 덩달아 살아난다.
구수한 멸치 국물이 설설 끓고 있는 손칼국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아버지는 엄마가 끓여주는 칼국수와 만두국을 유난히 좋아 하셨다. 이마에 구슬 땀을 흘리며 그렇게 맛나게 드셨는데 왜 대단치도 않은 칼만두국 한 그릇도 자주 모시고 와 사드리지 못 했을까? 때 늦은 회한으로 마음 한켠이 서늘해진다. 간이 의자에 앉아 칼만두 한 그릇을 시킨다. 멸치 장국에 숭덩숭덩 비진 감자와 파릇한 애호박을 굵게 채쳐 넣고 쫀득한 손칼국수와 김치 만두를 넣어 팔팔 끓여 김가루 듬뿍 뿌리고 고소한 통깨도 한 수저 넉넉히 고명으로 얹어 한 대접 가득 담아준다. 뜨끈한 칼국수 국물 한 수저에 엄마 손맛이 올라와 앉는다. 담백하고 구수하다. 훌훌 불어 가며 목 구멍 넘기는 뜨거운 국물에 슬몃 고개드는 그리움을 녹인다. 오늘 따라 유난히 뵙고 싶어지는 두 분 모습에 목이 메인다. 며칠 있으면 엄마 기일이 돌아온다. 이번 기일에는 괴산 현충원에 계시는 부모님을 꼭 찾아 뵈어야겠다.
엊그제 비 오더니 아침, 저녁 옷깃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제법 서늘하다. 벌써 가로수 잎들이 붉으레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더러는 찬비에 낙엽이 져 뒹군다. 나무들도 제 할일을 끝내고 생존을 위해 생살을 떨어내며 겨울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정들었던 것들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언제나 안타깝고 아릿한 슬픔으로 가슴이 에인다. 가을이 오면 늘 떠나간 사람들의 빈자리가 더 허전하게 느껴진다.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못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괜스리 허둥대지고 기다림에 서성여진다. 나이 칠십 넘어도 부모님 생각하면 여전히 아이가 된다. 가을비가 추적대고 오니 어째 더 스산스럽다.까닭없는 외로움이 온몸을 휩싼다.
사람 그리워 파고들던 외롭고 슬프던 고양이의 눈망울이 자꾸 아른거린다. 왜 집을 나왔을까? 길을 잃어버렸을까? 아님 주인에게 유기 된 것 일까? 소슬한 바람에도, 떨어지는 낙엽에도, 길 잃은 고양이 생각에도 소녀처럼 애달프고 떠나간 사람들이 절절하게 그리워지는 걸 보니 가을은 가을인갑다. 쓸쓸해지는 마음 못견뎌 가을 바다 보러 훌쩍 동해로 떠난다는 지인 누구처럼 나도 가을을 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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