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단상

깨를 볶으며

조은미시인 2024. 6. 8. 12:54

깨를 볶으며
조 은 미

  이유 없이 하기 싫은 일이 있다. 내게는 깨를 볶는 일이 그렇다. 꽤  오래 전에  지인이 집에서 수확한 참깨를 보내왔다. 귀한 선물을 냉동고에 보관하며 늘 숙제처럼 깨를 볶아야지 벼르기만 하다  깨가 떨어지면 마트에서 볶아놓은 참깨를 사오기 일수였다. 양념통에 깨가 얼마 남지 않았다.오늘은 기필코 깨를 볶아야지 결심하고 깨 볶을 채비를 서두른다. 힘들게 농사 지었을 수고를 생각하며 한 톨도 해실 되지  않도록  몇 번을 조심해가며 씻었다. 정성스럽게 조리질을 하며  훍을 걸러냈다.  번거롭고 수고롭기 그지 없는 일이다.  깨끗이 씻은 깨를 후라이팬에 넣고 나무주걱으로 타지 않게 자주 저어가며 볶아준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다. 옛날 외할머니께서 솥뚜껑을 엎어 놓고 하롯불에서 깨를 볶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화롯가의 그 정겨웠던 모습과 유난히 나를 아껴주셨던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솟는다. 점점 물기가  말라가며  노르스름 하게 색갈이  변히더니 통통해진 깨가 한 알 한 알 톡톡 튄다. 고소한 내음이 꼬끝에 감돈다.  손끝으로 몇 알 집어 깨물어 본다. 잇새에 톡 터지며 번지는 고소한 맛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마트에서  사먹는 수입 참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온몸에 고소함이 밴다. 이 근사한 일을  왜 마다 했을까?  해보지도 않고 힘들거라고 단정 짓는 막연한 선입감은 얼마나 어리석고 나태한 일인지!  언제부터인지 빠르고 편한 것에 길들여져 시간과 노력이 드는 slow  food 의 깊고 진솔한 맛을 외면하고 사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
  불의 담글질을 견뎌낸 참깨만이 비로소 제 맛을 드러낸다. 편한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듯 고통이 꼭 우리에게 아픈 것만은 아니다. 고통을 이겨내고 성숙함으로 서는 삶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작년 10 월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접고 고향으로 내려올 때만 해도 마음이 많이 어려웠다.
모든 것을 단절하고 이 산골에서 혼자 살아낼 수 있을까? 조금은 두렵고 자신이 없었다.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안의 저울추가 긍정으로 기울면 고통을 이겨낼 힘이 생긴다. 믿음은 긍정을 자라게 한다. 고통이 익은 자리마다 감사의 열매가 맺힌다.
  눈 뜨면 마주하는 초록의 향연, 신선한 공기, 한가한 여유, 편안한 이웃들, 주변에 좋은 분들과의 새로운 만남,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 진 것은 더 할 수 없는 감사의 조건이다.  씨를 뿌려 오롯이 자란 야들야들한 상추를  갓 뜯어 한 술 그득 밥을 얹어 쌈을 싸먹는 재미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아삭아삭 푸르름이 씹힌다.
파크골프에 빠진 짝사랑도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매일 즐겨하는 연습에 그렇게 안나가던 비거리가 조금씩 늘어난다.  제멋대로 굴러가던 공도 제법 제 방향을 찾아서 똑바로  나간다. 쨍그랑 홀컵에서 울리는 경쾌한 소리는 나를 신명나게 한다. 달큰한 피로감을 안고   장돌 구장에서 돌아온다. 해질 녘  환상적인 노을에  취한다. 하나님 당신의 창조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자연의 경이로움과 넉넉함 앞에 서면  잡다한 번민에서 해방되는 자유함을 느낀다.
  때가 차면 고통은  지나간다. 궁지에서 건져내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그분 안에 거할 때 굽었던 길도 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문제 해결함을 받은 요즈음 평안함을  누리며 날마다 깨를 볶고 산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생기로 활기가 넘친다. 새 날에 대한 기대로 아침을 연다. 날마다 선물같이 주어지는 날들. 고소함이 넘쳐나는 내 삶에 오늘도  감사함으로  하루를 더한다.

환상적인 저녁 노을


상추가 얼마나 연한지

보라색 가지 꽃이 사랑스럽다

아욱도 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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