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단상

ㅡ선물

조은미시인 2022. 10. 15. 08:58

선물
조 은 미

목적을 가진 왜곡된 선물이 뇌물로 둔갑해 때로 인생의 발목을 잡는 일도 허다하지만 진심을 담은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게 한다.
은퇴 후 서울에서 왔다갔다하며 텃밭에 농사를 짓고 있는 초등학교 남자 동창이 올해는 고구마 농사가 잘됐다며 한 상자 챙겨놓았으니 틈나는대로 가져가라고 연락이 왔다. 또 다른 절친이 저도 한 상자 챙겨줘서 내 몫까지 집에 갔다놓았으니 가지러 오란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준다는 선물도 가지러 갈 새가 없어 오늘은 오후 일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전에 잠깐 다녀올 요량으로 아침 일찍 나선다. 새벽 같이 들이닥쳐도 반겨주는 벗이 고맙다. 정성스레 쌀국수로 아침을 차려준다. 얼마나 맛나던지. 머리통만한 고구마에 초보 농부의 땀과 수고가 배여 있다. 이 고구마를 캐기 위해 여름내 땡볕에서 애썼을 친구의 정성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온다. 시장에서 돈 주고 사먹는 고구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과 우정의 무게가 얹힌 소중한 선물이다. 마침 시골에 내려와 있는 고구마 임자를 느티나무 길목에서 만나 추어탕 한 그릇을 사서 들려보낸다. 검게 그을은 삶의 진실 앞에 뭉클한 감동이 인다.

설악 인터체인지를 나와 춘천과 서울로 갈라지는 길목에서 잠깐 갈등한다. 빠듯한 시간을 생각하면 서울로 직행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남편이 있는 남춘천으로 핸들을 꺾는다. 땅에 누워 있는 사람, 가본들 말 한 마디 할까마는 때로 그리움이 솟구칠 때는 그 앞에 서기만해도 위로가 되고 힘을 얻는다. 죽은 이들의 안식처에는 언제나 고요와 평화가 감돈다. 울긋불긋 조화가 적막과 어울어져 반긴다. 그이와 나란히 새겨진 내 이름의 비문 앞에 서면 다시 한 번 내 삶을 돌아보며 점검하게 된다. 언젠가 본향에 돌아갈 때 부끄럼없이 설 수 있을까? 나와 나란히 어깨를 맞댄 사진속의 그이는 언제나 웃고 있다.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여보 당신 잘 살고 있어하고 격려해주는 그이의 손길이 느껴진다. 나도 마주 보고 웃어준다.

사랑이 다하지 않았을 때 떠나 늘 그리움을 선물로 남겨주고 떠난 그이. 언제나 그이를 향한 내 사랑은 현재 진행형으로 박제되어 가슴 속에 산다. 인생 후반기에 아직 기력이 있을 때 자유와 시간적인 여유를 선물로 안겨주고 간 그이가 있어 작은 외로움까지도 감사로 견딘다. 지금까지 병석에서 고통 속에 함께 하고 있다면 서로 웬수가 되어도 진즉 되었을지 모른다. 육신의 고통을 벗고 평안한 안식 가운데 거하는 그이의 삶도 축복이고 늘 사랑을 담고 사는 나도 축복이다. 사랑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이다. 한집에 살면서도 서로 각 방을 쓰며 남남처럼 대면대면 삭막하게 지내는 부부들이 의외로 많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같이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게 아니다. 같이 있기에 더 외로움을 느끼는 부부도 있다. 비록 만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지만 늘 그리리워하며 사는 내가 덜 외롭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떠나면서 주고간 마지막 선물을 즐기면서 남편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애틋한 사랑은 그 깊이가 더 깊어진다. 높은 곳에서 멀리 내다보고 나를 지켜주는 남편이 있어 든든하다. 그이가 주고 간 선물에 보답하며 사는 길은 그이 몫까지 더 씩씩하고 행복하게 살다 가는것이 아닐까? 돌려줄 보따리가 크고 무거워지도록 나머지 삶을 알차게 살아가자. 여보! 사랑해. 눈을 찡긋해주고 돌아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 빛이 곱다. 오늘은 유난히 하늘도 푸르고 맑다.

'자작 수필,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이 머무는 언저리  (0) 2022.10.19
소통 안에 누리는 행복  (0) 2022.10.17
소확행  (1) 2022.10.14
3계간문예 가을 문학 기행 소묘  (0) 2022.10.12
ㅡ가을을 타는가 보다  (0) 2022.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