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단상

누룽지

조은미시인 2022. 12. 27. 22:26

누룽지
조 은 미

임인년 한해도 막바지를 넘는다. 며칠 남지 않은 날들이 괜스리 아쉽고 허전하다. 정든 것에 대한 이별은 늘상 그렇다. 까닭 없이 마음이 비어오는 쓸쓸함이 있다.
밤새 시간을 죽이며 TV와 눈싸움하다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다. 새벽 예배에 채널을 맞추고 마음을 모은다. 아침 입맛이 깔깔하다. 밥이 넘어 갈 것 같지가 않다. 압력 솥에 눌은 누릉지에 물을 붓고 끓인다. 딱딱하게 늘어 붙었던 누릉지가 부드럽게 일어난다. 물에 풀어지며 구수하게 끓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김치찌개 한 냄비 앞에 놓고 식탁에 앉는다. 푹 무른 김치 한 줄기 걸쳐 뜨거운 누릉지와 함께 먹는 맛이라니. 환상적인 궁합이다. 아침 밥상을 격식 갖춰서 차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함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염색약 마른 가루를 물에 갠다. 가루가 물과 어우러져 눅진한 반죽이 된다. 희끗희끗 올라오는 흰머리에 펴 바른다. 1 시간여 기다렸다 머리를 감았다. 흰 머리에 갈색 물이 들어 감쪽 같이 나이를 감춰준다.

물이 들어가니 딱딱했던 누릉지도 제 안의 구수함을 드러내고, 가루로 있던 염색약도 제 빛갈을 내며 물을 들인다. 물은 형체가 없다.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가위나 칼로 자를 수도 없다. 주 재료는 아니지만 물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하나로 섞이고 부드러워진다. 물 안에서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이 우리가 된다.
영화나 연극에서도 주연을 더 빛나게 하는 조연이 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서로를 친밀하게 엮어주는 물과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그것이 정이고 사랑이 아닐까?

오늘은 대학 동기들 모임이 있는 날이다. 아침부터 설레고 기다려진다. 등산할 사람들은 오전에 망우산 등산을 하고 등산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점심에 회식 장소로 바로 모이기로 했다. 등산은 엄두가 나지않아 포기하고 회식 장소로 바로 가기로 한다. 아직 건강하게 산을 오를 수 있는 건각을 가진 친구들이 부럽기마저 하다.

식사 후 입가심을 위해 귤 한 상자를 사들고 회식 장소에 도착했다. 작은 배려는 서로를 행복하게 한다. 40여 명이 넘는 동기들이 모였다. 언제 만나도 반갑다. 아직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건강이 있어 감사하다.
지난 일년을 돌아보며 가는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건배를 한다. 내일 일은 장담할 수 없지만 팔십이 되어서도 모두 이렇게 모이자고 덕담을 주고 받는다. 화기애애한 담소가 이어진다. 삭막한 세상에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우리가 사는 날 중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젊은 나이이다. 남은 날이 짧기에 이런 만남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식사 후 시 낭송과 하모니카를 부는 순서가 주어졌다. 어느 장소에서나 시낭송과 하모니카가 자리를 부드럽게 하는 물이 된다. 늦게라도 배우기를 얼마나 잘 했나 싶다. 나이들어 가며 악기를 한 가지 다룰 수 있으면 훨씬 촉촉한 감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이 들어 간다는 건 희로애락의 감정이 점점 무뎌지는 것을 뜻 한다. 건조해지는 노후를 좀 더 윤기있게 살아가려면 스스로 감성의 각을 예리하게 다듬으며 살 일이다.

식사를 서빙하는 직원이 친절하기 그지없다. 그 바쁜 와중에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손님들에게 성심껏 응대한다. 반찬도 눈치껏 넉넉히 채워준다.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넉넉한 마음이 된다. 따로 작은 마음이라도 챙겨주고 싶어 주머니가 절로 열린다.
나이 들어가는 만큼 마음 씀씀이도 더 넓어지면 좋겠다. 머무는 자리마다 물의 유연함으로 서고 싶다. 부드럽고 구수한 누릉지처럼 서로의 편안함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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