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똥
조 은 미
며칠 온 눈으로 발이 묶였다. 이틀 꼼짝도 안하고 두문 불출했다. 마당에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적막 속에 제대로 설경을 즐길 여유를 갖는다. 눈을 치워야지 하는 조바심을 내려놓으니 설국의 평화가 찾아온다. 어제부터 날씨가 픅하더니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한다. 오늘은 마당의 눈이 거의 녹았다.
오! 누구라서 햇님만큼 깔끔하게 눈을 치울 수 있으랴. 유리알 처럼 맑은 하늘, 눈부신 햇살, 이마에 땀이라도 송글송글 맺힐 것 같은 따사로움, 이런 날 집에 머무는 건 용서할수 없는 게으름이다. 웅크렸던 몸에 날개가 솟는다. 마침 절친이 생일 선물로 보내준 스타벅스 커피를 나눌 벗을 찜해 번팅으로 불러낸다.
무시로 부르면 달려올 벗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녀와 마주 앉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친절과 넉넉함이 한결같아 신뢰를 더한다.
그녀의 손에는 빨간 비트와 야콘이 들려있다. 새롭고 좋은 것은 늘 나누는 넉넉함이 고맙고 푸근하다. 유리창에 쏟아지는 햇살이 따사롭다. 잔설이 남았있는 들판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와 낭만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평화와 행복이 커피잔에 녹아든다. 마주보는 눈속에 서로를 향한 사랑과 감사가 머문다 . 카페를 나서 장돌 구장으로 향한다.
장돌 구장에는 눈을 치우러 온 유명파크클럽 회원들로 북적인다. 내 집 마당은 허리 아파 못 치웠어도 눈 삽을 들고 거든다. 함께 함이 기쁨이고 힘이다. 우리가 되는 순간 모두 하나가 된다. 잠깐 사이 눈 덮인 구장의 잔디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구슬 땀을 흘린 보람이 있다. 총무가 엽엽하게 끓여 주는 따끈한 차 한 잔에 땀 흘렸던 수고가 녹는다. 하늘엔 구름이 웃고 모두의 가슴엔 웃음이 벙근다. 몇 라운드 돌고 집에 돌아온다. 이렇게 상쾌할 수가! 행복이 통통거리고 활력이 솟는다.
야콘과 비트를 깎아 목을 축인다. 사각사각하고 달달하니 혀끝이 상큼하다.
일과를 마치고 누우려는 참에 변의를 느껴 화장실로 향한다. 물을 내리려는 순간 너무 깜짝 놀라 경악을 한다. 온통 변기가 빨갛게 물들었다.
아니 왠 피가? 갑자기 장이 어떻게 됐을리도 없을텐데. 뭐가 잘 못 된 걸까? 자세히 관찰하니 핏빛 보다는 좀 더 밝은 자주빛에 가까웠다. 비트 색이었다.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낮에 먹은 비트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배아플 때 손바닥으로 배를 쓸어 주며 불러주시던 외할머니의 노랫가락이 생각 난다. " 배야 배야 똥배야. 된 밥 먹고 된 똥 누고 술술 내려가라 . 내 손이 약 손이다" 배설은 먹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매일의 변 상태는 건강의 바로미터이다. 먹은 대로 정직하게 반응한다. 푸른 채소를 많이 먹은 날은 푸른 변이 빨간 야채를 많이 먹은 날은 빨간 변이 나온다. 심은 내로 거둔다고 했던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내가 머문 자리도 내 인격이 그대로 남는다. 어디서나 내 서 있는 자리가 향기로 남도록 삼가 자신을 조심하고 다스려야겠다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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