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단상

고항, 그 정겨움의 언저리

조은미시인 2022. 5. 15. 06:49









고항, 그 정겨움의 언저리
조 은 미

내가 자란 고향 마을이 우리 집에서 산 하나 넘으면 지근 거리에 있다.
외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빈 집으로 오래 남아있다 폐가가 되어 그마저 헐어버리고 텃밭 딸린 집터만 남아있다.
지척이 천리라고 산만 넘으면 가볼 수 있는 곳을 연고가 끊어지다 보니 가볼 염을 못내다 외사촌 동생들이 빈터에 감자랑 강낭콩을 심어놓고 틈나는대로 가서 텃밭을 가꾸고 있다고 하기에 거기도 좀 들여다볼 겸 마을도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핑계김에 일삼아 외사촌들을 따라 나선다.
자랄 때 그리 넓던 개울이 완전 도랑 수준으로 변하고 집도 많이 들어서 어릴적 고향 모습은 간데 없고 어렴풋이 군데군데 옛 모습이 남아있어 여기가 내 고향이련 싶어 새록새록 떠오르는 옛 추억에 젖는다.
나이들면 고향이 그리워지는게 인지상정인지 다니면서 농사짓기는 제법 먼거리 인데도 딸 넷이 모여 고향 찾는 재미로 텃밭을 가꾸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감자와 강낭콩이 너울너울 잘 자라고 있다.
텃밭 옆에 옛날 샘물이 퐁퐁 솟던 자리에 샘은 없어졌는데 샘길은 막히지 않았는지 작은 도랑에서 싱싱하게 초록의 싱그러움을 뽐내며 돌미나리가 자생하고 있다.
얼마나 연하던지 욕심껏 가위로 베어온다.

텃밭을 돌아본 후 활골 넘어가는 길 중간에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산도 같이 둘러 본다.
외할아버지 생전에 억척스레 개간하셔서 논을 일군 600 여평 남짓한 땅이 30 여년 돌아보지 않아 도로 산으로 변한 것을 외사촌 동생 제부들이 나서 몇 해 전부터 나무들을 베어내고 다시 밭으로 만들어 오늘은 엄나무 모종을 200주 남짓 심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다.
직장 생활 하는 틈틈이 농사일에 취미를 붙이고 왔다갔다하며 제법 그럴듯하게 가꾸어 놓았다.
자연을 즐기는 삶의 여유가 느껴진다.

늘 여름이면 베잠방이가 흠뻑 땀에 젖도록 대리끼 하나 가득 참외를 따오셔서 몫몫이 나눠주시며 우리 먹는 것만 기특해서 힘든지도 모르시고 흐믓해하시던 외할아버지 모습이 생각난다.
옛날 남의 소작을 지으며 땅에 포원이 졌을 때 처음 내 땅이라고 사셔서 산길을 올라가기도 수월찮이 먼길인데 기계도 없던 시절 손수 손으로 땅을 파고 논으로 풀어 농사를 지으셨다니 얼마나 힘드시고 어려우셨을까? 다랭이 논에서 하 부지런하게 일하셔서 생전 처음 내 땅에서 거둔 벼로 식구들 배불릴 생각에 힘든 것도 모르시고 일하셨던 두분의 수고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 온다.
그리 부지런하시고 힘든 일도 마다않고 하셨던 덕에 아무 것도 없이 맨주먹으로 시작하셨던 없는 살림에 외아들 대학도 가르치고 그 여러 남매 보릿고개에 태반이 굶던 시절 배 곯리지 않고 키워내셨다.
그래도 생전에 그리 아끼시고 땅을 불려놓으신 부지런함 덕분에 논 마지기 밭 떼기라도 유산으로 남겨주고 가셔서 자손들이 고향을 찾으며 자연에서 여가를 즐길 수 있으니 이 또한 두분의 은혜에 감사할 일이다.
돌아보니 나물도 지천이다.
제부가 알려주는대로 광대싸리 잎과 묏미나리, 참반디나물을 곧 많이 뜯어와 데쳐 울군 후 갖은 양념에 무쳐 저녁상에 올리니 얼마나 맛나던지!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그리움이 솟고 푸근해진다.
같은 산과 들, 같은 하늘이어도 내 고향 하늘, 산과 들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무리지어 핀 애기똥풀마저 정겹다.
사람도 같은 고향 사람이면 유난히 반갑다.
삶이 고단할 때 고향은 한가닥 위로가 된다.
애틋한 고향에 대한 추억이 없는 황량한 콘크리트 벽들로 둘러쌓인 도시에서만 자란 세대는 고향이란 말에 우리 세대가 느끼는 이런 찡한 감동이 있을까?
추억할 고향을 가슴 안에 담고 사는 축복에 감사한다.
고향의 자연도 자연이지만 그리움의 더 깊은 곳은 사람이리라.아직 마을을 지키고 있는 함께 자라던 지인을 만나니 더 반갑다.
잘 자란 상추며 쑥갓 푸성귀를 한아름 뜯어 들려주는 인심에 고향이 더 따사릅게 가슴에 안긴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휴전선에 막혀 가보지 못하는 실향민들!
내 고향을 돌아보며 느끼는 행복 속에 고향을 잃은 이웃의 아픔이 비로소 보인다.
내가 자란 뿌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살아 생전 고향 땅을 밟아볼 염원이 이루어지려는지!
고향을 그리워하며 꿈에도 못잊어 가슴 아파하는 세대가 점점 사라지기 전 하루 속히 북녘의 고향 가는 길이 열려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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