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은 미
어느듯 가로수의 푸름도 짙어간다.
한낮의 아스팔트 열기가 훅훅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시원하게 빗줄기라도 한 줄기 퍼부어 주면 좋으련만.
오늘도 후덥지근한 날씨가 저녁에 비를 몇 방울 뿌리는 듯 싶더니 목빠지게 기다리는 대지에 감질나게 갈증만 더하고 그냥 지나간다.
그나마 길거리 나서면 마스크 벗은 사람이 눈에 많이 띄고 심리적으로 코로나에 대해 둔감해지는 안도감으로 숨통이 트인다.
지근 거리에 살면서도 뭐가 그리 바쁜지 서로 얼굴 본지도 한참이나 지난 가까이 지내는 옛 직장 후배가 오랫만에 집에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사랑이 많아 푸근하고 항상 옆의 사람을 배려하고 챙기는 마음이 따뜻한 그녀는 만날 때마다 늘 엔돌핀이 솟는다.
같은 사람을 만나도 에너지가 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차 웃음과 너그러움이 없고 남 비평하고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갈고리 같은 사람은 만나고 나면 그 기운이 전염되는지 기가 빠지고 덩달아 우울해지고 피곤해져 될수록 만나는 걸 피하고 싶어진다.
좋은 사람 만나서 하하 호호하기도 짧은 시간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까지 만나 시간 축내고 우울하게 살아야 할 까닭이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피하고 싶은 상대는 아닌지?
안 보면 궁금하고 보고싶고 전화라도 걸어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인지?
모쪼록 내가 먼저 늘 얼굴에 웃음을 띄고 상대의 가슴에 따뜻함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초인종 누르는 소리에 마주 나가 반긴다.
오랜만에 반가운 해후를 한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따끈한 팥죽과 시원한 상추 물김치가 들려있다.
나는 워낙 팥죽을 좋아한다.
팥죽에는 유난히 어린 시절 행복했던 향수가 남아 있다. 외할머니께서 팥죽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우정 외손녀딸 먹이느라 활활 타는 장작불 지펴가며 설설 끓는 가마솥에 구슬 땀 흘리시며 팥을 푹 고아 으깬 진국으로 쑤어 주시던 팥죽이 얼마나 맛나던지!
팥죽을 먹을 때마다 행복했던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늘 그 맛을 그리워 했는데 어디서도 그런 깊은 맛이 나는 팥죽을 먹어보지 못해 추억 속의 맛으로만 남아있다. 나를 생각해 들고온 정성이 고맙고 넘치게 받는 사랑이 행복하다.
한 술 입에 무니 외할머니 손맛이 느껴지는 깊은 맛에 탄성이 나온다. 혀끝에 오래 남는 팥의 진한 고소한 뒷 맛에 옛날 그 맛이 느껴진다.
외할머니가 입 속에 가득 찬다
순간 그리움이 왈칵 솟는다.
어려서 외갓댁에서 많이 자란 탓에 엄마만큼이나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각별하다.
향수를 자극하는 그 맛에 외할머니를 소환하며 행복해한다.
너무 맛나게 먹는 내 모습에 그녀도 기쁨으로 환하게 웃는다.
금방 점심 물린 끝이라 배가 불러 더 들어갈 틈이 없는데도 팥죽 한 공기를 맛나게 비우고 그래도 아쉬워 숟가락이 놓아지지가 않는다.
상추 물김치도 한창 맛이 들어 시원하고 맛나다.
마법의 손처럼 늘 그녀 손 끝에서 빚어지는 음식들은 한결같이 침샘을 자극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영어 공부에 열중하고 풀룻에 오카리나에 요가에 한번 손대었다 하면 쇠 힘줄 마냥 끈질기게 잡고 늘어지는 성실함으로 전문가 수준에 이르는 그녀를 보면 부럽기도 하다.
나는 시작은 잘 하는데 뭐든 오래 붙잡고 늘어지는 끈기가 부족해 이것 저것 배우기는 많이 했는데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걸 보면 뭐든 한 우물을 파는 진득함이 있어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평범한 생활 철학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접시꽃 씨를 나눠주며 내년 여름에 그녀의 정원에 내 마음이 담긴 접시꽃들이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서로 사랑하는 이가 가까이 곁에 있다는 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늘 사랑하는 사람으로 울타리 쳐주시고 외롭지 않게 보호해 해주시는 그 분의 은총에 감사한다.
배웅하고 돌아서는 가슴이 따사롭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따스함으로 서고 있나 돌아 본다.
사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사랑하며 사는 일이 서로를 얼마나 따스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일인지를!
사랑받고 사랑함으로 생기로운 날들이여!
팥죽을 타고 온 사랑으로 오늘도 푸근하게 젖어드는 행복감에 감사하며 하루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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