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은 미
하루 걸러 한 번씩 이런 저런 약속들이 이 빠진 듯 걸려있어 느긋하게 시골 다녀올 짬을 못내다 비어 있는 시골 집에 다녀온 외사촌 동생이 언니네 보리수 딸 때가 겨워 다 떨어지게 생겼다는 귀뜸에 서둘러 시골집을 향해 나선다.
오뉴월 하룻빛이 다르다고 며칠 전에도 푸릇푸릇 하던 보리수 열매가 터질듯 빨갛게 익었다니!
고녀석들 앙징맞은 모습이 눈에 삼삼해 틈새 누워있는 날을 억지로 깨워 하룻밤이라도 자고올 요량으로 서둘러 달린다.
애인이나 만나러 가는 것만큼 설렌다
온통 민들레 밭으로 변한 앞마당에 앙징스런 민들레 꽃들이 할짝 웃으며 반긴다.
풀 나오지 말라고 깔아놓은 자갈이 무색하게 이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민들레 영토가 돼 버렸다.
앞마당이라고 풀 하나 없이 빤빤하고 깔끔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조금만 마음을 넉넉하게 먹으면 풀 때문에 그리 성화를 대고 사생결단하고 덤빌 일도 아니다.
자갈 사이 초록이 무성한 것도 여유있고 자연미가 있어 좋다. 아쉬울 때는 만들레 잎 한 줌 뜯어다 쌈을 싸도 좋고 데쳐서 나물을 무쳐도 보약이 따로 없다 .바상대지 않고 느긋하게 즐기기로 마음 먹으니 세상 만사 근심거리가 없고 심신이 편안하다.
옷도 채 갈아입지 않고 보리수 문안부터 한다.
세상에! 초록 잎새 사이 수줍게 얼굴을 드러낸 붉디 붉은 입술.
나를 기다리느라 가슴까지 빨갛게 탓나 보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
매혹적인 그 붉은 빛 속에 취한다
올해는 매실도 자두도 꽃이 하얗게 무성해서 기대했더니 어쩐 일로 매실도 몇 알 안 달리고 자두도 열매 달린 게 손가락으로 셀 정도인데 조롱조롱 빨갛게 익어 흐드러지게 늘어진 보리수만 효자 노릇을 하고있다.
그래 널 보려고 그 바쁜 틈새 달려온 보람이 있구나.
살다보면 산술적인 계산으로는 타산이 안맞는 일이지만 때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있다.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소중함이 내 안에 가득 찰 때 사는 것이 행복하고 나를 세우는 힘이 된다.
사랑도 우정도 자연이 주는 이런 선물도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상큼한 공기도 삶의 여유도 희망도 상호간 신뢰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이런 가치들이 대접 받을 때 세상이 평화롭고 우리도 행복해진다.
빨간 루비가 매달 린 듯 화사한 보리수를 보석 따듯 한 알씩 조심스럽게 딴다.
한 알 또옥 따서 입속에 넣으니 새꼼 달꼼하고 상큼한 그 맛조차 사랑스럽다.
새랑 반씩 나눠먹자 싶어 대층 듬성듬성 따다 손길을 거둔다.
한 소쿠리 실한 녀석들을 뭘할까 망설이다 물을 조금 넣고 푹 끓여 씨를 받쳐내고 설탕을 넣어 뭉근한 물에 오래 나무 주걱으로 저어가며 눅진하게 졸여 쨈을 만들었다.
정성과 사랑 , 맛과 향이 쨈에 녹아들어 시중에서는 살 수 없는 나만의 유일한 어떤 의미가 된다.
한 솥 그득하던 것이 졸고 졸아 형태는 없어졌지만 보리수의 상큼하게 시고 달콤한 맛과 향이 응어리져 남았다.
보리수가 아니고는 안되는 그 무엇이 쨈 안에 녹아 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낌으로 그 존재를 느낀다.
보리수 빛과 향을 쨈에 가두고 행복한 미소로 허리를 편다. 그래 아픈 허리를 혹사해도 행복할 만큼 돈으로 따질수 없는 소중한 기쁨을 선물 받은 오늘! 덧셈의 하루를 보태며 감사함으로 두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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