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머무는 뜨락

고수동굴, 출구를 기다린다 / 조 은 미 어둠이 삼켜 버린 입구 희미한 불 빛 아래 미로 속 외길이 홀로 서 있다 머무는 형상들 태고의 신비가 똬리 틀고 한 땀 한 땀 어둠을 뚫고 빛 따라 걷는 길 한 마리 박쥐가 된다 미로가 끝나는 곳 한줄기 빛이 어둠도 두려움도 그렇게 다 지나가는 것..

동그라미 / 조 은 미 새벽녘 골목길 낡은 리어카 위에 박스가 쌓인다 허리가 땅에 닿을 듯 할머니는 던져주고 할아버지는 두 다리를 파르르 떨며 종이 탑을 세워놓고 탑돌이 하고 있다 어찌 도는 것이 노부부뿐이랴 인생도 돌고 돈도 돌고 명예도 권세도 내가 버린 쓰레기도 내가 버린 물..

인연 / 담소 조 은 미 꽃다운 나이 부부로 만나 50년 함께 한 세월 미운 정 고운 정 나인지 당신인지 주름진 얼굴 여윈 손 굽은 허리 세월이 내려앉은 가녀린 어깨 반신불수 20여년 남편의 팔 다리 되어 더 이상 나이기를 체념한 숙명 꺼진 눈매 애잔함 흐르고 마주 잡은 손끝 따라 따스함이 ..

빛바랜 사진첩 /조 은 미 잠깐 다녀온다며 나간 낭군 소식 없던 강을 건너 날아온 전사 통지서 달랑 한 장 꿈에도 그리던 열아홉 새색시 가슴 맺힌 한 그 임 간 것 믿기지 않아(삭제) 낭군 줄 두루마기 곱게 지어 한 벌 장롱 속에 넣어 놓고 빛바랜 사진 속 세월 멈춘 그때 그 얼굴 마다마디 ..

민들레 피는 뜻 / 조 은 미 한겨울 땅속 숨죽여 기다린 날들 따사로운 봄볕 환희의 축제 흔하디흔해서 반기는 이 없고 귀히 여기는 이 없어 오가는 이 차이는 발 길 서러운 한 참고 또 참고 길바닥 한 귀퉁이 밟히고 또 밟혀도 오롯이 품은 꿈 가슴에 새기며 희망의 노란 별 머리에 달고 정..

바람은 / 조 은 미 손가락 사이로 햇살이 흐르는 오후 1시 푸른 강을 바람이 끌고 코끝에 스치는 아카시아 향기 창공의 뭉게구름 따라 목이 길어지는 누구의 발자국인가 더 가까이로 당신 그림자 푸르게 드리우네.

꽃에게 / 조 은 미 언제나 내 곁으로 다가와 살고 있구나 꽃, 꽃, 꽃아 겹겹이 껴안은 꽃잎 속에 덮고 다시 덮는 함박꽃이구나

뜨락 / 조 은 미 닫혔던 가슴 살포시 열고 아스라이 멀어진 날들 되새기면 거기 밀어오는 나붓한 시詩의 물결 그때 그 시절 나무도 시가 되고 돌도 시가 되는 가슴에 뜬 달메마른 가지에 소롯한 바람결 따라한마리 새 되어 하늘을 난다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스치듯 지나는 희미한 형상들..

아침이 오는 소리 / 조 은 미 자욱한 안개 속에 아무도 열지 않은 새벽 바다 흰 거품 한 입 문 파도가 모래톱 간질이고 희뿌연 해무 속 갯바위 어스름 이고 있다 입가에 가득 솔향기 머금은 상큼한 바람 부드럽게 입맞춤하고 환한 햇살 수줍게 얼굴 내밀어 살포시 구름 휘장 걷어 올린다.

단비 내리는 날 / 조 은 미 똑똑 또도독 기다리던 님의 노크 소리 콩닥콩닥 뛰는 가슴 살포시 문 열고 반가운 님 마중 부드럽게 흐르는 님의 숨결 메마른 대지 적시고 촉촉한 대지의 품안에 사랑이 어우러진 희망의 합창 푸르름이 살아나는 생명의 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