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자작시 343

이혼 계고장

이혼 계고장 조 은 미 멋모르고 시작한 동거 사람이 죽어나가는 살얼음판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네요. 당신한테 의지해서 코 막고 재갈 물리고 숨도 못쉬고 산 시간들 당신 몸 값이 한창 비싸던 때 당신을 차지하려 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당신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고 안심이 되었지요.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어요 하이칼라 아스트로제네카가 내 맘을 뺐네요 시절 쫓아 변하는 여자 마음 너무 허물 마시고 나를 고만 놓아주세요. 우리 이혼 합시다 저는 제 갈 길 가렵니다 법원 판결 나기 전 몇 달간 숙려 기간 준다니 옛 정 생각해 그동안은 참아 줄께요. 마스크여 이별일랑 너무 서러워 말아요. 헤어짐이 아픔만은 아닌 것을

영상자작시 2021.06.09

9월의 기도

9월의 기도 조 은 미 무자비한 코로나 휩쓸고간 자리 꿈을 잃은 사람들 산봉우리 끌어눕힌 가슴마다 해님 향해 눈 맞추는 해바라기 닮게 하소서 창조 질서 거스르고 대적하며 가치관이 혼돈된 불신의 시대 서로를 증오하며 높이 쌓는 이념의 벽 깊고 맑은 9월의 하늘 바라보며 사랑과 이해로 하나 되게 하시고 거룩함과 평화로 우리 안을 채우소서 거짓이 판치는 어둠 속 기도를 들으시고 밝은 빛으로 인도하시며 의인의 굽은 길을 펴주시는 당신 애통한 가슴마다 해가 내려와 사는 꿏밭 알알이 들어찬 희망 옹골 차게 익어가게 하소서

영상자작시 2020.10.08

봉숭아 꽃물 들이기

봉숭아 꽃물 들이기 조 은 미 한여름 내내 울타리 지키며 붉은 꽃잎 달고 있는 봉숭아를 보면 까닭없이 애잔해진다. 수줍게 웃을 듯 말 듯 고개를 떨어뜨린 모습하며 난하지 않은 그 붉은 빛이 가슴을 파고들면 잊고 있던 젊은 날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몽글 몽글 운무처럼 피어올라 그리움의 샘물이 솟는다. 올해는 꽃이 지기 전 꼭 봉숭아 꽃물을 들여야지 별렀는데 마침 반갑게 번팅으로 찾아온 벗이 있어 서들러 한 웅큼 봉숭아 꽃과 잎을 따 급한대로 소금을 넣고 도마에 콩콩 찌어 잎으로 싸맨 후 비닐로 한겹 더 싸 실로 챙챙 감아준다. 옛날 엄마가 손가락을 싸매주시던 그 때를 떠올리며 아릿한 추억에 젖는다. 손톱에서 꽃잠을 재우며 행여 밤새 빠져나갈까 비닐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꽃꿈을 꾼다. 설레임으로 꽃집을 벗겨내..

영상자작시 2020.08.31

봉숭아 이야기

봉숭아 이야기 조 은 미 한여름 내내 울타리 지키며 줄줄이 피어나는 줄장미 부러운 가슴 푸른 톱니 날카롭게 세우고 빈 둥지 부끄러움 다독입니다 드디어 붉은 꽃잎 터지던 날 꽃잎이 2장 뿐인 본태생 장애아 주눅든 얼굴 고개 숙여 빨갛게 물이 듭니다 아린 상처 안고 태어난 내 새끼 입 앙다물고 꿋꿋이 세파 이겨내며 두 날개 활짝 폅니다 반 쪽 짜리 생기다만 녀석도 얼굴 곧추 들고 웃습니다 잎새 마다 피어나는 봉황 여인의 가슴 그리움 물들이고 첫눈 내리는 날 만날 그 님 그리며 가녀린 손톱마다 봉황의 꿈을 꿉니다

영상자작시 2020.08.26

장맛비

장맛비 조 은 미 당신이 그리울 때가 있었지요 기다림에 지쳐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먼지가 풀풀 일던 날들 당신 발소리 들릴 때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 기뻤지요 얼굴엔 화색이 돌고 세상은 온통 생기로 살아났어요. 하루 이틀 지나면서 너무 변해버린 당신 모습에 우울합니다. 당신이 휩쓸고 간 자리 목이 꺾이고 허리가 부러지고 뿌리까지 뽑힌 난교의 흔적 질척거리고 음습하고 광포하고 폭군으로 군림한 당신 더 이상 당신은 내 사랑이 아닙니다. 어느새 당신을 피하고 싶어집니다. 이제 제발 좀 고만 떠나 줄래요

영상자작시 2020.07.30